​

​

1984년, 스물다섯 살 청년 유시민이 맨손으로 써 내려간 <항소이유서> 는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던 청년 지성의 찬란한 불꽃이었습니다. 법정의 판사조차 감탄하게 만들었던 유려한 문장과 벼려진 논리는 그를 단숨에 시대의 지식인으로 밀어 올렸습니다. 이후 그가 펴낸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기성 권력의 위선과 반칙을 가차 없이 파헤치던 그의 날카로운 혀는 대중에게 일종의 지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습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방송으로 복귀했을 때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JTBC <썰전>과 tvN <알쓸신잡>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좌우의 진영을 넘어 모든 세대가 믿고 의지하던 '박학다식하고 품격 있는 어른' , '합리적 상식의 멘토' 그 자체였습니다. 보수 논객과의 치열한 토론 속에서도 유머와 팩트를 잃지 않던 그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빛나던 성채는 스스로 내뱉은 한마디의 오만한 선언과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지식인이 스스로 권력의 '어용(御用)' 을 자처하며 진영의 방패막이로 내려앉은 순간, 합리적 지성 유시민의 비극적인 변곡점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

1. 상식을 덮어버린 '내로남불'의 방패막이: 위선이라는 늪

과거의 유시민은 상식과 원칙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는 상대 진영의 특권과 반칙, 작은 도덕적 흠결에도 불꽃 같은 독설을 퍼부으며 정의를 요구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칼날이 자신이 속한 진영을 향하자, 그토록 예리하던 논리는 온데간데없이 구차한 '내로남불'의 궤변 으로 전락했습니다. 온 나라를 분노와 허탈감에 빠뜨렸던 조국 사태가 터졌을 때, 그는 대중의 보편적 법감정과 공정의 가치를 외면했습니다. 표창장 위조 의혹과 입시 비리의 명백한 증거들 앞에서도 그는 "조국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지키는 것" 이라는 기만적인 언어로 본질을 흐렸고, 검찰의 합법적 압수수색을 두고 "총칼 없는 쿠데타" 라며 지지층의 감정을 선동했습니다.

한때 젊은 세대에게 '정의와 공정'을 가르치던 스승 같던 인물이, 부모 찬스와 기득권 세습의 민낯 앞에서 진영의 수호신을 자처하며 억지 궤변을 늘어놓는 모습은 그를 아끼던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겼습니다. 상식이 진영 논리에 삼켜지는 순간,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도덕적 권위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

​

2. '팩트'를 잃어버린 언어의 연금술사: 음모론과 신뢰의 파산

유시민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치밀한 논리와 철저한 팩트였습니다. 그러나 '어용'이라는 진영의 갑옷을 입은 이후, 그의 언어는 팩트가 아닌 '확증편향'과 '음모론' 으로 오염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파국의 정점이 바로 '검찰의 노무현재단 계좌 추적 불법 사찰' 주장입니다. 2019년 말부터 그는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검찰이 노무현재단과 자신의 계좌를 불법적으로 들여다봤다" , "한동훈 당시 대검 반부패부장이 배후에 있다" 며 대대적인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국가기관의 사찰 프레임을 씌워 지지층을 결집하려 했던 이 주장은, 그러나 1년 뒤 스스로 "어떠한 증거나 사실도 찾지 못했다" 며 고개를 숙이는 촌극으로 끝났습니다.

결국 그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어 대법원에서 벌금 500만 원의 유죄 확정판결 을 받았습니다. 팩트를 생명으로 삼아야 할 지식인이 근거 없는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수모를 겪은 것입니다.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리던 논객이 저열한 유튜브 음모론자의 수준으로 추락한 이 사건은, 유시민이라는 지식인이 맞이한 '신뢰의 완전한 파산' 을 알리는 상징적 이정표였습니다.

​

​

3. '따뜻한 멘토'에서 '독선적 훈계자'로: 스스로를 삼켜버린 부메랑

유시민의 추락에서 가장 서글픈 대목은, 그가 노년에 보여주는 태도가 과거 젊은 시절 스스로 경계했던 바로 그 '추한 기성세대의 전형' 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2004년, 그는 한 대학 특강에서 한국 정치의 세대교체를 역설하며 이렇게 일갈한 바 있습니다.

"60세가 넘으면 뇌세포가 썩는다. 60세가 넘으면 자리가 어디든 물러나야 한다."

청년의 패기로 내뱉었던 이 독설은, 그 자신이 6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 가장 뼈아픈 부메랑이 되어 심장에 꽂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유시민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2030 청년 세대를 향해 "책을 안 읽어서 보수화된다" ,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는 식의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습니다. 과거 청년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다정하게 소통하던 멘토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내가 옳고 너희는 무지하다'는 식의 꼰대적 훈계와 오만 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에서 대중은 더 이상 합리적 지성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만든 말의 감옥에 갇혀 버린, 가장 완고하고 독선적인 노정객의 초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입니다.

​

​

​

​

4. 일그러진 영웅의 초라한 뒷모습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학급의 절대권력자로 군림하던 엄석대 는 새로운 담임선생의 단호한 상식과 진실 앞에서 초라하게 성채를 잃고 몰락합니다.

한때 대한민국 지식 사회의 엄석대처럼 찬란한 위세를 떨쳤던 유시민의 오늘이 이토록 서글픈 까닭은, 그의 몰락이 외부의 폭력이나 탄압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선택한 진영에의 맹종, 상식을 저버린 오만, 그리고 자신만은 언제나 옳다는 확증편향 이 스스로 불러온 필연적 자멸입니다.

지식인의 존재 이유는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비리를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권력 앞에서도 서슬 퍼런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데 있습니다. 영혼을 진영에 내어준 지식인의 말로가 얼마나 구태의연하고 추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지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유시민의 초라한 뒷모습을 통해 뼈아프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